송길영 선생님의 『시대예보: 호명사회』에 시뮬레이션 이야기가 나온다. 정보가 많아져서 우리는 시뮬레이션을 하게 되었고, 그 부작용을 알면서도 모두가 시뮬레이션을 돌리니 혼자 안 할 수는 없는 법이라는 이야기다. 머릿속으로 온갖 경로를 다 밟아보다가 지쳐서 정작 한 발짝도 못 내딛는 상태. 그게 지금 시대의 기본값이다.
AI 도 같은 느낌이다. 모두가 AI 쓰고 날아가니까 안 쓸 수 없는 노릇이다.
기술은 사람의 의도를 증폭시킨다. AI 와 함께 unknown unknowns 를 탐하다 보면 발산이 증폭된다. 당연하다. 모르니까, 모르는 것을 알려면 발산의 과정이 선행되어야 한다. Design Thinking 이 발산과 수렴을 굳이 두 모드로 갈라놓은 이유가 여기 있다. 문제가 무엇인지도 모르는 상태에서는 후보를 넓히는 일이 먼저다.
문제는 수렴이다. 발산은 강하게 증폭되지만 수렴은 그렇지 못할 때가 있다. 증폭된 능력으로 여러 세션을 오가고, 매일의 삶에는 컨텍스트 개입이 끊이지 않는다. 그러다 보면 Working memory 가 소진된다. AI 가 좋은 후보들을 가지고 와도 그 발산을 수렴시킬 맥락과 에너지는 쉽게 소실된다. 머릿속이 널부러진 작업장이 된다.
이게 나 혼자의 체감인 줄 알았는데 연구도 같은 방향을 가리킨다. GenAI 가 협업 디자인 씽킹에서 발산·수렴 역학을 어떻게 바꾸는지 innovation sprint 3회, 71개 팀, 18개 기업 파트너를 관찰한 Business Horizons 논문 은 초기 탐색 단계의 강점과 수렴 단계의 한계를 비대칭으로 보고한다. 병목이 아이디어 생성에서 선택과 판단으로 옮겨 갔다는 뜻이다. 발산 도구를 하나 더 붙이는 것으로는 처리량이 늘지 않는다.
Anthropic 의 디자인 헤드 Jenny Wen 은 디자인 프로세스가 죽었다 고 아예 선언했다. 엔지니어가 에이전트 여러 개를 동시에 돌려 기능을 쏟아내는 환경에서, 목업을 먼저 만들어 팀을 이끄는 순서는 성립하지 않는다. 디자이너의 역할은 흐름을 막는 gatekeeper 에서 방향을 잡는 guide 로 옮겨간다. 발산 비용이 붕괴하면 프로세스의 무게중심도 옮겨간다는 이야기다.
수렴을 하려면 블랙홀처럼 강한 인력을 가지고 증폭된 발산을 응집시키는 기준이 있어야 한다. 이 힌트는 Goal 인 것 같다. 요즘 프롬프트 줄 때 goal 을 주라고 하는 게 수렴 지점을 미리 정해주기 위한 게 아닐까. goal 은 발산이 도달할 종착지를 미리 못 박는 수렴 장치로 읽힌다.
그리고 개인의 취향은 수렴 과정에서 AI 가 고를 선택지를 조율해주는 North star 가 된다. 취향이 새로운 병목 이라는 표현이 정확하다. 취향은 명시할 수 있는 기준의 축적이고, 그 기준의 수와 정밀도가 후보 집합을 좁히는 속도를 결정한다. 실행 비용이 0 에 가까워지면 남는 희소 자원은 판단이다.
송길영 선생님의 처방도 결국 같은 자리로 돌아온다. 정보의 과잉으로 지금 당장 한 걸음을 떼지 못할 때 가장 먼저 할 일은 ’ 나 ’ 로부터 시작하는 것이라고 했다. 호오 (好惡) 로 방향을 정하는 일. 호오를 수렴 기준으로 삼는 일은 자립의 조건에 가깝다.
그러니 발산은 계속 증폭시키고, 그것을 받아낼 블랙홀을 먼저 만들어 두는 것이 순서다. Goal 을 먼저 쓰고, 내 호오를 기준으로 벼려두고, 그 다음에 AI 에게 발산을 맡긴다. 머릿속을 작업장으로 만들지 않으려면 응집의 중심이 나에게 있어야 한다.